작성일 : 2020. 2. 11. 화요일 22:43

도덕이란 허상에 관해 글을 시작하려 한다. (2/15일이 최근작성일이고, 2/16일이 차라투스트라를 빌린 날이다. 내가 이 글을 쓴건 니체의 영향을 받은게 아니란 소리이다. 난 계속해서 정의에 관해 숙고하고 또 고민하는 중에 생각이닿았다. 니체는 여러 영감도 주고 이해하지 못할 말들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원본해석을 본게 아니라서 조금 부족하게 쓰였다고 느끼는건지는 모르겠다.) 글을 쓰는 행위는 사고의 전개를 도와준다.

먼저, 거의 모든 사고와 결론들이 그러하듯 이 또한 한 가지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의문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걸음이다.

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생명이 나 하나라면 악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세상에서 악을 정의하는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의 연쇄가 발생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 많은 아이러니를 보게된다. 직접 겪을 수도 있고, 마이클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에서 마주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그러한 모순이나 아이러니와 같은 혼란, 그리고 이 글에서 마주하게된 선악에 관한 혼돈 모두 필연적인 마주침임을 밝히고 싶다.

  1. 공의 세상 우리가 쓰는 언어는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 관습 등이 기저에 깔려있다

최초의 개념은 나 이다. 세상에 태어나 정립하게 되는 모든 개념은 일단 나의 존재 이후에 성립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개념에 탄생 요인이 없는 원론적인 개념은 나 하나다. 그 이유는 모든 개념의 정립 주체는 나이기 때문이다. (사전에 실리는 개념을 이야기하는 중이 아니다.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사건을 설명 중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념이 있어야 한다. 간혹 우리가 쓰는 단어는 원래의 뜻과 다른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우리의 뇌 속에 들어있는 모든것이 그러하듯 우리의 감각을 통해 학습을 한 결과인 1인칭 개념으로부터 생각을 발현하기 때문이다.) 이 근본없는 개념인 나 의 의미는 뭘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지만 누구도 이런 생각을 갖고 살지 않는다. 단지 나는 나이다. 나라는건 그런 것이다. 무한한 텅 빈 개념의 우주 어딘가에 갑자기 생겨난 물체인 것이다. 자 이제 내가 하고싶은 얘기를 할 준비가 끝났다. 지금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관점을 바꿔나갈 것이다.

  1.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릇과 컵을 어떻게 구분짓는가? 박쥐는 조류인가? 아닌가? 등등의 공통점은 인간의 눈에는 직관적이지만, 개념의 눈으로는 애매하다는 것이다. 먼저, 개념 탄생의 역사를 우리는 앞서 간단히 다루었다. 박쥐?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가 바로 박쥐다. 조류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건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선조학자들이 정해놓은것이다. (분류기준에 따르면 포유류라 한다. 고래가 어류가 아닌것 처럼) 또한 생명은 현대과학이 정의를 내리지 못한, 진행중인 의문이다.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모든 구분의 태생적 모순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모든건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자, 좀더 친숙하고 직관적인 의문을 가져와 보겠다. 유리는 고체일까 액체일까? 당연히 우리는 고체라고 한다.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리가 흐른다면 우리는 액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유리도 용융점 이상의 온도로 가열한다면 흐르는 물성으로 바뀌게 될것이다. 더 뜨겁게 가열한다면 기화가 될 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걸 말하는게 아니다. 유리는 상온에서 실제로 흐른다. 다만, 수백년에 걸쳐서 흐르기 때문에 보기에 고체처럼 보일 뿐이다. 놀라운가? 실제로 오래된 역사깊은 성당의 유리창 아랫부분을 보면 윗부분보다 두껍다. 이는 유리가 실제로 흐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두꺼워진 것이다. 자 이제 다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우리는 유리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고체로 생각할 것이다. 왜? 그게 일상적 직관에 여전히 들어맞으며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에는 꿀은 액체인지 묻도록 해보자. 꿀은 액체인가? 그렇다. 일단 흐를 뿐더러, 일상적 직관에도 부합한다. 두 케이스는 무엇이 달랐는가? 점성이 어느정도일 경우에 우리는 액체라 부르게 되는가? 그런 분류는 모두 편의에 의해 불리는 것이 된다. 더 자세한 분류가 필요하다면, 오직 학자들에 의해 필요하기 때문에 분류가 내려지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 정의란건 그런 것이다. 미세한 세계로 들어가 쌀한가마니가 정확히 몇톨의 낟알인지 정의하게 된다면 그건 우리의 일상과 무관할 뿐인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 모든건 독자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피상적 의미보다 더 깊은곳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이야기이다. 어느정도 눈치 챘겠지만, 각각의 개념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념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왜? 우리와 연관이 있는데 왜 뚝 떨어진것이 될까? 필자의 생각에 좀더 깊이 들어가보자. 나는 개념의 정의란 오직 상대적 기술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너라는 정의는 너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 가 있기 때문에 정의되는 것이고, 어둠은 어둡다 자체로 어두운게 아니라 밝음이 있기 때문에 밝은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김치는? 김치는 김치가 있으니 김치라고 하는 것이다. 뭔가 반대의, 대비되는 것이 존재해서가 아니지 않는가 하게된다. 하지만 그건 좀더 많은것들에게 대비를 빚지고 있다. 세상에 김치만 존재한다면 아무도 김치를 김치라 하지 않는다. 그냥 무언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김치인 것이다. 좀더 이해하기 쉬운 예시로는 숫자가 있다.

… 개념의 우주는 xyz축의 3차원 공간이 아니다. 상상의 장면은 우리의 시각적 현실경험에 기초하므로, 3차원처럼 머릿속에 그리게 되지만, 실제 개념의 우주는 물질object축과 작용축으로 분화된다. 그리고 이 작용축은 물질계에 존재하는 물질간의 상호작용 만큼 세분화 된다. 그리고 특정 물질간의 상호작용의 묶음을 인간people축이라 할 수 있다. 인간 또한 물질의 결합체이고 인간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추상명사 또한 결국 물질간의 상호작용들간의 결합으로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실재하는 것끼리의 결합으로 치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왜 인간축에 유효한 값을 갖는 모든 개념과 정의들이 이리도 불완전한 건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불안한 기반으로부터 만들어진 언어는 명백하게 모호성을 띄게 될 수 밖에 없으며, 인간의 역사는 언어로부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불완한 결합체끼리의 결합형태가 발전된 언어와 문자이고, 그러한 불완함을 잠재우려는 노고 또한 흔들리는 지반위에서 균형을 잡는 듯한 묘기일 수 밖에 없다. 이에 비해 수학이 매우 논리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거의 물질축이라는 실재의 단일축 위에서 정립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 또한 그 한계와 모호성이 없을 수 없는데 그것은 숫자 1의 탄생자체가 인간의 모호한 개념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하나인가에 대한 모호성은 계산되지 않는 1과 2사이의 수치들과 무리수 같은 모호성을 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숫자 1의 개념의 모호성 단일만 존재하므로, 이와 같은 모호성은 그 부르는 표현 속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인간축은 숫자와 같이 안정되기 힘들다. 그 이유는 인간축의 태생적 모호성(:단일고정축이 아닌 수많은 작용을 내재하는 특성)에 기인한다.